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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재대학교 경영대학 김철교 교수


막이 내려지고 있는 지난 천년의 그림은 흉물스럽기만 하다. 가난한 나라들은 전쟁과 질병으로 인한 고통 속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으며 여유있는 국가들은 물질만능 속에서 정신영역이 사막화되어 가고 있다.

나라마다 꿈에 부풀어 다채로운 행사로 맞이하려는 새로운 세기는 어떤 모습일까? 많은 석학들이 21세기는 지식이 지배하는 사회가 될 것이라고 한다. 지식은 사회구조를 근본적으로 바꿀 것이며 전통적인 생산요소였던 토지, 자본, 노동은 부차적인 요소가 되고 지식이 가장 핵심적인 자원이 될 것이다.

또한 정보통신의 발달로 전 인류가 1대1의 관계로 연결되어 모든 정보를 공유할 수 있는 세계적 차원의 네트워크가 구축될 것이라고 한다. 이러한 지식이 지배하는 21세기를 떠 바치고 있는 두 기둥은 무엇보다 정보와 시간이라 하겠다.

정보의 홍수가 눈 깜짝할 사이에 전세계를 덮어 버리고, 기술은 물론 가치관까지도 너무 빨리 변하는 세상이 다가오고 있다. 과거의 10년 혹은 100년에 이루어졌던 일이 새로운 세기에는 하루면 족할지도 모른다. 그만큼 초를 다투는 세상이 된 것이다.

정보는 얼마든지 가공해서 질 좋은 상품으로 만들 수 있지만 시간은 한번 지나면 그만이며 짧기도 하다. 우리가 일생 활용할 수 있는 시간은 1만 시간정도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기본 생활유지를 위해 필요한 시간을 제외하고 나면 우리 자신의 발전을 위해 쓸 수 있는 시간은 얼마 되지 않는다는 계산이다.

희랍어에 시간을 나타내는 말로 크로노스와 카이로스라는 개념이 있다. 크로노스는 객관적인 시간 곧 시계로 표시되는 시간이요 카이로스는 특별한 삶의 의미나 중요한 사건의 시간으로 사람마다 그 무게가 다르게 느껴지는 시간이다. 시간을 카이로스로 받아 들이는 사람은 시간의 노예가 되지 않으며 주어진 시간 속에서 남보다 값있는 역사를 창조한다.

촌음을 어떻게 쪼개쓰느냐에 따라 역사책에 많은 지면을 차지하는 발자욱을 남길 수도 있고, 그저 연못에 돌을 던지면 일어나는 파문정도로 금방 잊혀지는 인생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만큼 시간의 내용과 밀도가 중요한 것이라고 하겠다.

시간을 가장 잘못 사용하는 사람이 시간이 없다고 불평한다. 시간은 모든 사람에게 똑같은 양으로 분배되어 있다. 양이 문제가 아니라 사용방법이 문제인 것이다. 바쁘다는 말과 시간이 없다는 말은 시간을 잘 관리하지 못한다는 뜻이 된다. 시간관리는 자기관리이며 자기관리만 잘하면 시간관리를 잘하는 게 된다. 시간관리는 서두르지 않고 인생을 살게 하며 삶을 효과적으로 운영하는 예술이라고 하겠다.

그러나 만족스러운 시간관리란 쉽지만은 않은 것이 사실이다. 많은 사람들은 습관과 타성에 빠져 여지껏 해 내려온 방식대로 살려고 하기 때문이다. 자기 틀 속에 안주하기를 좋아하며 변화하려 들지 않는다. 삶이 변화되기 위해서는 과거의 모습과 현재의 상태를 객관적으로 진단할 필요가 있다. 정확한 진단만이 병을 완치할 수 있는 것처럼.

시간관리를 잘 하기 위한 처방으로는 우선 무엇보다 삶의 청사진이 충실하게 마련되어 있어야 할 것이다. 그 설계도 위에 착실히 공정에 따라 벽돌을 쌓아갈 때 아름다운 집을 지을 수 있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은 자기 집을 완성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가고 있다. 설계도조차도 없는 사람은 아름다운 집을 꿈꿀 수도 없다. 인생의 확실한 목표는 곧 좋은 설계도라 할 것이다. 그것이 거창할 필요도 없고 좋고 나쁜 것도 없다. 자기 인생관에 적합한 설계도면 될 것이다.

다음으로 시간계획을 마련해야 한다. 한해를, 한 달을, 하루를 아무런 계획 없이 시작한다면 아무리 설계도가 좋아도 부실공사를 면할 수 없다. 완벽한 설계도라 할지라도 공사를 진행하면서 계속 수정해 나가는 것처럼 모든 계획은 속성상 수정하기 위해 있는 것이다. 비록 잘 지켜지지 않는 계획이라도 없는 것보다는 훨씬 낳다.

나는 가끔 책장을 정리하면서 20여년 전 처음 회사에 입사한 후 지금까지 사용했던 업무 수첩을 들춰보곤 한다. 대학을 졸업한 후 회사에 입사해서 업무수첩을 손에 들게 된 후 회사를 떠나 대학에 몸담은 지 9년여가 지난 지금도 매년 새로운 업무수첩에 연초 계획을 세우고 매월 초에는 지난달의 반성과 새달의 할 일을 점검하고 있다. 하루를 시작할 때도 업무수첩을 점검하지 않으면 도대체 되는 일이 없다.

그 동안 10년도 못되는 대학강단의 세월에 십여 권의 책과 수십 편의 논문을 쓰게 된 것도 업무수첩에 적힌 잘 짜여진 계획 때문이었다. 제법 값진 시간살이를 해왔다고 자부하고 있지만 지난 20년이 넘는 세월동안 업무수첩 1월 단골메뉴의 하나는 바뀌지 않고 있다. 남부끄럽지 않은 시집을 한 권 내고 싶은 꿈이 그것이다.

대학 때에 황동규 교수님으로부터 배웠던 예이츠의 사랑과 시에 반해버린 후 대학 문학회 활동을 시작으로 시를 쓰기 시작한 것이 아직 열매를 맺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내 업무수첩의 메뉴로 올라 있는 한 틀림없이 이루어질 것이라는 믿음으로 산다.

전공이 재무관리이어서 숫자와 논리로 짜여진 시간의 여백에 시 쓰기를 끼워넣고 있긴 하지만 나름대로 산과 바다를 찾으면서 좋은 시를 읽을 수 있는 여유로움은 삶의 큰 활력소가 되고 있다.

시간계획이 없는 사람에게는 여유시간이란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주어진 시간의 어느 부분이 여유인지 알지 못할 테니까. 바쁨과 여유로움, 그것은 전혀 성격이 다르면서도 분명 동거할 수 밖에 없다.(한전사보 특집, 1999.11)